1강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1.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이 중요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각 단어의 뜻을 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에 있는 단어의 뜻을 아래 표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있는 단어들의 뜻은 어디에서 찾아보아도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위함이니 이 단어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각 단어의 뜻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태초에”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브레쉿'(בְּרֵאשִׁית)이다. 이 뜻은 시간의 처음 그 자체라기보다는 마치 영원 속의 어느 특정한 때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집트의 창조 문헌들이 유사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한 예로, 테베 출신의 어떤 사람이 태초에 즉 “첫 번째 시기에” 진화한 아문(Amun) 신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집트 학자들은 이 태초를 어떤 추상적인 관념이 아닌 어떤 첫 번째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성경에서의 용법과 이집트 문헌에서의 유사성을 놓고 본다면, 성경은 창조 기사를 인류 역사의 서막을 보여주는 최초의 특정한 기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시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엘로힘'(אֱלׁהִים)은 창조의 주체며, 행동하고 말씀하시는 신이다. 역사의 시작이며 유일하신 절대자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의 민족 신, 여호와를 엘로힘과 동일시했다. 엘로힘은 보통명사로 어느 신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 이 단어는 단지 창조주, 혹은 절대자에 대해서 통상적으로 쓰이는 것이며, 형태로는 복수지만 의미상으로는 단수이다.

“하늘”과 “땅”은 각각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성경에서는 따로 사용된 것이기 보다는 메리즘(merism)이라는 하나의 문학기법으로 같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메리즘은 극과 극의 두 요소 또는 상반되는 두 가지 대상을 함께 언급함으로써 전체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하늘과 땅”은 단어 뜻 그대로 ‘하늘과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창조하셨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라’(בָּרָא)를 사용한다. 이 동사는 구약성경에서 48회 등장하며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동사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주어로 취하며, 따라서 특징적인 신적 활동을 나타내는 것임이 틀림없다. 이 동사의 목적어는 사람들, 예루살렘, 바람, 불 구름 등등 무척이나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이 동사의 용례는 무(無)에서 어떤 물질을 제조(manufacture)하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제조 자체가 핵심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바라'의 본질은 천지를 존재하게 하는 것과 관계가 있으며, 역할들과 기능들을 조직하고 부여함으로써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예술 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역할과 기능을 조직하고 부여함으로 실제로 작동하게 하지는 못한다. 창세기 1장에서 이 어휘는 사람의 창조에 대해서 강조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말해주고 있다.

창세전의 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부분이 2절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아직 땅이 창조되지 않았는데, 땅이 어떠하였다라고 당시 땅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본문은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역할과 기능을 조직하고 부여하는데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질서를 세우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땅이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닌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고(תֹּהוּ,보후), 텅 비어 있는 상태(בֹּהוּ,토후) 즉 무질서한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형태가 없는 상황을 '혼돈'(formless)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혼돈은 무질서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창세기가 기록된 시대와 지역을 한마디로 고대 근동지역이라고 한다. 고대 근동에서 혼돈의 존재는 관심사였다. 그 우주 안에서 격동하는 바다와 흑암이 바로 혼돈의 세력들이다. 인간 존재라는 범위에서 거기에 상응하는 가장 보편적인 대상이 바로 죽음과 전쟁이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서 신들은 혼돈의 세력을 물리치거나 저지함으로써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한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은 형체가 갖추어지지 않고 텅 비어있는 무질서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질서가 있는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내용을 쉽게 이해하였을 것이다.

또 땅의 상태에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흑암을 앞에 내세우시는 경우가 있으시다(신 4:11-12, 5:23-24). 이러한 상황과 비교해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 위한 상황이 충분히 제시가 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창세기에서도 바로 다음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게 된다. 요한복음 12장 4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면 어둠은 하나님의 반대 개념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反)하나님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이 실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할 어떠한 존재도 존재할 수 없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한글개역에서 ‘하나님의 신’으로 번역되어 있는 부분은 ‘하나님의 영’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감돌고 계셨는데, 하나님의 영은 창조 사역의 주체이시며, 그의 창조능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시 104:30).

3절부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 날에 '빛', 둘째 날에는 '궁창', 셋째 날에는 '땅 위의 각종 식물',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 다섯째 날에는 '새와 물고기', 여섯째 날에는 '짐승과 사람'을 만드시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을 취하셨다. 창조전의 상태가 무질서한 상황이었다면, 그 상황을 종료시키시고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만드신다. 그 질서는 세상을 창조하시는 순서에서도 발견이 된다. 첫째 날과 넷째 날, 둘째 날과, 다섯째 날,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이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첫째 날에 빛을 만드시고 그 빛을 주관하는 것을 넷째 날 만드셨다. 둘째 날에는 궁창을 만드시고 다섯째 날에 그 안에서 활동하는 새와 물고기를 만드셨으며, 셋째 날에는 땅 위의 각종 식물을 만드시고 여섯째 날에는 그것을 먹고 사는 존재들을 만드셨다(1:29). 이 순서에 대해서 뭐라 딱 잡아 말하기는 어려우나 하나님께서는 질서 있게 창조를 하셨으며, 가장 마지막에 창조하신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신다(1:26).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본인의 계획과 질서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취하셨다.

단어를 조금 더 살펴본다면, 첫째 날 창조하신 빛은 각종 발광체를 망라하는 개념이다. 그 이유는 넷째 날에 창조하신 해 만이 빛을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날 창조하신 궁창의 창조 목적은 물과 물을 나누기 위한 것이다.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고 칭하신다. 그래서 궁창은 아마도 '창공'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셋째 날에는 둘째 날에 궁창으로 물을 나누시고 궁창 아래의 물을 한곳으로 모이게 하셨는데 이때 땅이 드러난다. 땅은 땅 위에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있는 열매 맺는 과일나무를 각기 종류대로 내었다.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다. 이때야 비로소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하루의 개념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날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24시간 개념의 날과는 다르다. 다섯째 날은 둘째 날 창조하신 궁창에 그 주관자를 세우신다. 여섯째 날에는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신다. 이때 짐승은 종류대로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짐승뿐만이 아니라 식물도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식물이나 동물이 우수한 능력을 갖은 것만 살아남아 더 월등한 존재로 진화한다는 진화론은 성립될 수 없다. 여섯째 날에 창조된 것은 셋째 날에 창조된 것을 먹는 존재들인 짐승과 인간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짐승과 인간은 구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것은 그분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자 모든 것이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으며, 그 이루어진 모습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무질서가 있었으며 그 상태는 반(反)하나님 적인 어둠이었습니다. 반하나님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또한 질서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하여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으며, 모든 것을 복종하게 하는 권능이 있다.

하나님께서 본문에서 하루하루 지날 때 마다 하신 말씀은 "보시기에 좋았다"이다. 이 말씀은 “그대로 되었다”라는 말씀과 뜻이 비슷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원하셨던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른 창조물과 마지막으로 창조된 인간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먼저 같은 날 창조된 짐승과 인간을 살펴보면, 짐승과 인간은 창조되는 방법이 다르다. 짐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창조 되지만,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보다 앞서 창조하신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 위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기신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대리통치자로 삼으시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물을 맡기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장 28절). 이 내용은 시편 8편에서도 언급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뒤로 물러나 계시며 인간에게 전적으로 맡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며 그분의 뜻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취하셨다. 하나님의 안식은 그의 창조에 대한 완전성과 만족감에서 나온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가장 마지막에 창조하신 것은 사람이다. 이미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질서한 상태에서 질서를 세우시며 하나님의 계획대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이것이 다섯째 날까지의 상황이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 창조의 마지막이며 하이라이트(highlight)인 사람을 창조하신다. 여섯째 날에 사람과 함께 땅 위의 짐승들도 함께 창조가 되었으며, 짐승이 사람보다 먼저 창조가 된다. 그러나 여섯째 날에 관심은 사람에게 쏠려 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다. 1장 26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 위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우리”로 지칭이 되고 있는 부분을 초대교부들은 삼위일체(Trinity)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위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진행하실 때 하나님 단독으로 진행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확인하였다. 그리고 또한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 창조사역이 진행이 될 때 그리스도께서도 함께 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맡기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계획이 있으시며 그 계획을 진행해 나가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 가운데 가장 애착을 갖으시고 만드신 창조물은 사람이다. 그 이유는 6일째 창조된 것은 짐승도 있다. 짐승과 사람은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다(2:19). 그런데 짐승과 사람의 차이점은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어주신 것(2:7), 임무를 맡기실 계획(1:26), 임무를 맡기시는 것(2:19)이다. 사람과 다른 창조물들과의 관계를 보면 사람이 다른 창조물보다 창조 과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구성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데, 사람은 몸과 생명의 호흡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람의 이분설(영혼, 육)과 삼분설(영, 혼, 육)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하신다. 형상과 모양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본질이나 속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 근동의 문헌에 이 두 어휘는 서로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왕을 신의 형상이라고 했다. 이는 아마도 지상에서 신을 대신한 왕의 통치 기능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신하여 그가 만든 피조물을 통치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참 지식(골 3:10), 거룩함과 의(엡 4:24) 등의 내면적 속성을 갖은 존재라는 것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이나 직책의 속성도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가 되었다 할지라도 사람은 하나님과 똑같아 질 수는 없다. 하나님과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며, 하나님과 사람을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 없는 행동을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다. 하나님과 비교가 될 수 없는 존재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명(임무)을 주신다. 이 사명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 사람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은혜)을 주신다. 즉 사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아서 감당하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

하나님께서 창조물을 모두 만드셨다. 그 가운데 에덴동산도 있었는데 에덴동산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모든 나무가 있었으며, 나무들 가운데 더욱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그곳에는 강이 있었는데 4개의 강이 있었다. 강의 이름은 비손, 기혼, 티그리스(힛데겔), 유프라테스이다. 이 네 개의 강들은 실존하였던 강들이며 이 강들의 의미는 에덴동산이 어디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에덴동산의 풍요로움과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으로 사용되고 있다. 4곳에서 물이 흘러 들어오는 모습은 고대근동지역에서 신전이나 왕궁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주전 18세기경 마리(Mari)에 있는 짐리림(Zimri-Lim) 궁에는 벽면에 대관식 장면을 담을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주전 13세기 시대의 아슈르(Ashur)에서 발굴된 상아로 된 장식품은 중앙에 신의 모양을 새겨 놓았는데, 그 신에게서 네 시내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강의 이름들이다. 4개의 강 이름이 나오는데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힛데겔)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강이다. 그러나 비손 강과 기혼 강을 찾기 위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이 강의 정체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두 강은 확연히 드러나기 전까지 미스터리한 존재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명령(사명)을 하신다. 그 명령은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사람은 성실히 수행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모든 가축과 하늘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을 이름을 붙였다. 지금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동물과 새가 없다는 것을 보면 아담의 지적 능력이 상당히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아담의 이러한 능력은 아담이 공부를 통하여 얻은 지식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음으로 인한 것이다(1:26).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동산의 나무에 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네가 먹을 수 있으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마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2:16-17)” 모든 나무의 과일을 먹을 수 있게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동산의 가운데로 시야를 돌리게 하신다. 동산 가운데에 나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곳에는 생명나무도 있었다. 나무들 가운데 특별하게 지칭이 되고 있는 나무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의 열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을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생명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있다는 것이며 생명나무라는 이름을 생각해본다면, 생명나무의 열매는 생명과 관련된 열매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은 영원불멸한 존재로 창조가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생명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지 생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생명나무의 과일을 한번만 먹어도 영원히 살 수 있다와 주기적이 되었든 비주기적이 되었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주장 가운데 후자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잠언에서 생명나무를 언급하는 구절이 4곳이 나온다(잠 3:18, 11:30, 13:12, 15:4). 여기에서 주된 관심사는 생명의 연장이며, 특히 잠언 3장 16-18절은 지혜의 유익 가운데 장수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살기 위하여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했으며, 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때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앞에 두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을 때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 것이다. 시편 8편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과 기능적인 속성이 사람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순간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확실히 정립하기 위하여 동산의 가운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생명나무 옆에 두셨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과일을 먹을 때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기능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매번 확실히 정립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을 죄의 유혹에 빠지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들지 않은 실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에 홀로 있는 종(種,kind)은 사람이 유일하다(20).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오신다. 이때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이고 살 중의 살이다”라고 고백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짐승에게는 짝이 있으나 아담에게 짝이 없게 하셨던 이유는 아담이 자신을 돕는 배필의 소중함을 더욱더 느끼게 하시기 위함이다. 아담이 동물들을 보며 아내의 매력을 느끼게 하셨고, 그 아내를 더욱더 사랑하며 섬기게 하시기 위한 계획을 갖으셨던 것이다. 아담의 고백에서 남자와 여자는 본래 하나라는 친밀성을 강조하며, 남자와 여자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이상적인 역할을 제시한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를 정의해주는 말이다. 배필이라는 말을 상하관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닌 친밀함을 기반으로 하여 ‘돕는 자(helper)’를 뜻한다. 또한 이 장면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결혼 공식이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아담을 돕는 배필을 아담 스스로 구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다. 즉 하나님께서 배필을 지어 주시고 주례를 서시며 성혼(결혼)을 선포하신다(2:24). 따라서 결혼은 거룩한 것이며, 사람이 나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은 하나님으로 시작된다. 위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 짝을 만들어 주시고, 주선하여 주시며, 주례를 서주시고, 공포까지 해주신다. 그러므로 결혼은 하나님께서 진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하다. 남녀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

이 모든 것이 있는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 생명이 있는 곳, 먹을 것 걱정이 없는 곳, 사랑이 있는 곳, 위계질서가 있는 곳, 풍요로운 곳, 부끄러움이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