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 545장
날짜 : 2015년 3월 15일 주일예배
요약 :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변하지 말고 더 키워 나가자.
서론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십니다. 그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살아 계심을 증명하시거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에서 7개월간의 전투를 마치고 이스라엘의 영토에 돌아오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들의 믿음을 다시 생각해보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더욱 키워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어야겠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논의하는 블레셋(1-9)
블레셋 진영에서 여호와께서 싸우시는 장면을 앞의 본문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니 블레셋 사람들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인 다곤도 여호와의 손 앞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7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이후 7개월 이라는 시간은 기쁘고, 승리를 만끽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궤인 언약궤로 인하여 기쁨보다는 근심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군주들은 그들의 제사장과 점술가들을 불러 모아놓고 여호와의 궤에 대한 회의를 하게 됩니다. 이 언약궤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심각한 회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회의가 진행되면서 언약궤를 어떻게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느냐에 대한 이야기로 모아졌습니다. 블레셋의 군주들이 제사장과 점술가들을 불러 모은 것은 언약궤를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돌려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언가 자격으로 모인 사람들은 언약궤를 돌려보낼 때 빈손으로 돌려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 즉 여호와에게 속건제를 함께 드리라고 말합니다. 속건제는 죄를 사하는 제사입니다. 이들은 속건제를 속건 제물과 동일시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제사장과 점술가들은 블레셋 군주들에게 잘못이 있었음 인정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블레셋 군주들의 잘못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였으며, 언약궤를 그들의 신이 있는 다곤 신전에 가져다 놓은 것에 대한 잘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여 언약궤와 속건제를 돌려보내면, 병이 낫게 되며 왜 여호와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을 치셨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조언가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자 블레셋 군주들은 자신들이 어떤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언약궤가 블레셋에 있음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여호와의 언약궤 즉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치심이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고 한시라도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블레셋 군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군주들이 준비하여야하는 속건제는 블레셋 군주들의 수에 따라 금으로 만든 악성종기 다섯 개와 금으로 만든 쥐 다섯 개를 제시합니다. 이렇게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블레셋 모든 사람과 블레셋의 5군주 모두에게 여호와의 재앙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악성종기 형상과 쥐의 형상을 만들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시고 있는 손을 가볍게 하실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여기에서 추측을 하는 것은 조언가 그룹도 확신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알려주신 죄에 대한 제사는 블레셋의 조언가들이 제시하는 방법이 아니라, 동물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블레셋의 조언가들이 제시한 방법은 그들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방법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속건제는 틀린 것입니다. 우리가 4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블레셋은 하나님의 대한 지식이 많이 없는 것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언가 그룹이 한말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나 하나님에게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전에 제사장이었던 엘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던 모습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블레셋의 조언가 그룹은 이집트의 왕인 바로가 자신의 고집을 피우며 이스라엘을 잡아 놓으려 하였을 때, 재앙이 더 심해졌다는 이야기를 제시하며 언약궤를 이스라엘에 돌려보낼 것을 이야기합니다.
새 수레를 만들고 아직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먹이는 암소 두 마리를 데려다가 그 수레를 매게하고, 송아지들은 그것들에게서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그분께 속건제물로 드릴 금, 보물을 상자에 담아 그 옆에 놓은 후 수레를 보내라는 구체적인 답안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확신이 없었던 상황이라 과연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하나님의 손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조건도 하나 제시합니다. 만일 그것이 그 궤의 본래의 지역, 곧 벳세메스의 길을 따라 올라가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리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친 것이 그분의 손이 아니라, 그 일이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영토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궤(10-12)
블레셋의 다섯 군주는 조언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수레를 메고 가는 암소가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벳세메스까지 그 뒤를 따라갑니다. 수레를 메고 가는 암소들은 벳세메스까지 가는 길에서 좌로나 우로 방향을 바꾸지 않고 앞으로만 쭉 걸어갔습니다.
이 장면에서 간혹 주인공이 암소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암소가 자식을 버려두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하나님께서 제시하여 준 길을 갔으니, 우리들도 암소처럼 가슴 아픈 일들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제시하여 주신 길을 가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의 상황과 그가 걸어간 길에 대한 이야기가 핵심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제사장들이 제시한 방법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며, 그 일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소들을 이끌어 가심으로 인하여 블레셋의 조언가 그룹이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며,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을 치고 있으신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내용입니다. 또한 사람이 소에게 배워야 한다면, 그 사람은 소만도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동물보다 못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동물보다 못한 사람들을 욕할 때 사용되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비유를 한 것이지 실제로 동물보다 못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소에게서 믿음을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욕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암소들은 블레셋 조언가 그룹의 이야기대로 베셋메스까지 직진하였습니다. 그때 벳세메스의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추수하고 있었습니다. 언약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그들은 언약궤와 함께 온 수레를 쪼개고 암소들을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블레셋의 조언가 그룹이 이야기한 속건제물도 함께 번제를 드릴 때 놓여졌지만 그것이 주된 것이 아니라, 동물인 소가 번제의 제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또한 벳세메스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도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수레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뒤 따라왔던 블레셋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17절과 18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속건제물로 보낸 내역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가 가야 할 곳을 벳세메스로 지정을 하고 그곳의 사람들이 번제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벳세메스에는 도피성이 있으며, 제사장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영에 돌아왔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이것은 마치 해피엔딩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일어났던 일과 비슷하게 언약궤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인 벳세메스의 사람들이 오만 칠천 명이 죽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언약궤를 열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언약궤 안을 보았다는 말은 단순하게 안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언약궤를 구경꺼리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언약궤는 불과 7개월 전에만 하여도 실로의 성전에 있었던 신성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벳세메스의 사람들은 그 신선한 물건을 자신들이 임의로 열어 보거나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물건들을 성물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일반 물건과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더 이상 성물은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공장에서 찍어서 나오는 물건들인데 이것이 성물이라면, 그 성물을 만들어 내는 공장은 더 큰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의미 없습니다.
벳세메스라는 곳이 제사장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큰 숫자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것은 당시가 사사시대임으로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보다는 자신들의 소견에 맞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죽은 사람이 5만 7천명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 숫자는 당시 너무나도 큰 숫자입니다. 성경책을 보시면 숫자가 적혀 있는 부분에 각주처리가 되어서 각주 부분을 보면 ‘어떤 성경에는 5만이라는 단어가 없음’이라는 문구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표시된 부분도 염두에 두고 읽으셔야 합니다. 어찌되었든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약궤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벳세메스의 사람들이 이러한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기럇여아림에 사신을 보내 언약궤를 가져갈 것을 부탁합니다. 기럇여아림의 사람들은 언약궤를 옮겨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두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했습니다.
기럇여아림은 기브온 사람들이 살던 도시 가운데 한곳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수아 때 여호수아를 속이고 평화조약을 맺었던 가나안 민족입니다. 이들이 부담스러운 언약궤를 가져간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보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죽음이 따랐는데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가져간 이후 그것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벳세메스라 사람들과 다르게 언약궤를 언덕으로 옮기고 아비나답의 집에 두고,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엘리아살이 이스라엘 사람이었는지 레위인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언약궤를 어떻게 대해야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목적적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악한 영들은 도망을 갔습니다. 악한 영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항의도 하였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악한 영들에게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두렵고, 거역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많이 봐온 제자들이 있습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함께 하였으며, 함께하는 그 사역에서 많은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악한 영을 쫓아 낼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예수님처럼 악한 영들을 쫓아내는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느 순간 자만에 빠졌습니다. 그렇다 보니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한 영을 쫓아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왜 우리들은 쫓아내지 못합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의 작은 믿음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결론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벳세메스의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에서 싸우셔서 언약궤가 다시 이스라엘의 영토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벳세메스의 사람들은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많은 숫자가 언약궤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들의 죽음은 언약궤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온 것입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불과 7개월 전에만 하여도 언약궤는 실로의 성소에 있었던 신성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에 빼앗긴 7개월의 시간동안 벳세메스의 사람들은 언약궤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에게 언약궤는 더 이상 신성한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들에게 언약궤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면서 그들의 믿음 또한 변하였습니다.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신성한 물건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지고 판도라의 상자처럼 호기심만이 가득한 상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능력으로 악한 영들을 쫓아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역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이다”라는 생각이 희미해지면서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하였습니다. 그렇다보니 예수님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에게 있는 능력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결국에는 악한 영을 쫓아내지 못하고, 예수님에게 믿음이 적다는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우리들도 처음에는 아니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편해지기 시작을 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지니’라도 되는 것처럼 이것해주세요. 저것해주세요. 라는 식의 기도가 우리들의 삶을 지배해고, 그것이 잘 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은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며 하나님을 떠나거나 믿음이 약해지는 모습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져야 하는 마음은 먼저 그분에 대한 믿음이며, 그 믿음이 변하지 않고 그 믿음을 더욱 크게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즘과 같은 불신과 속고 속이는 사회에서 더욱더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하루 하루 우리들의 삶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한 평생을 고생하였으니 나도 이제 조금은 편하게 살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의심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시고,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헛된 것이 아닐까라는 고민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이렇게 연약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강건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해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해주세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 뜻 가운데 우리들이 포함되게 하여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