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 150장
날짜 : 2015년 1월 25일 주일예배
요약 : 나의 욕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자.
서론
하나님의 말씀과 환상이 드물게 일어나던 시대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과 환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뒤로 사무엘은 성장하며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본래 이 일은 엘리 제사장이 해야 하는 일인데 사무엘이 대신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3장 19절의 말씀처럼 사무엘이 하는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모두 이루어지는 것과 하나님께서 실로에 나타나셔서 사무엘을 세우시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런 시기에 블레셋이라는 민족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오는 사건을 우리에게 이야기 해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 패한 이스라엘(1-4)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말에 힘을 실어 주시는 시기에 블레셋이라는 민족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 아벡에 군대를 모아 놓았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막기 위하여 에벤에셀에 군대를 모아 놓고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은 시작이 되었고, 1차전에서 이스라엘은 패배를 하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4천명의 목숨을 잃게 되는데, 아직 왕정국가가 아닌 지파 단위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4천이라는 숫자는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큰 패배를 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쟁에서 지게 된 이유를 찾으려 노력합니다. 이 일은 장로들이 맡았는데, 그들의 결론은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결정 하신다’ 입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전쟁터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패하게 하셨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서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고, 그 언약궤로 인하여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장로들의 이런 결론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는 생각하지 않고, 전쟁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강력한 무기로 생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장로들이 이러한 결정이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민수기 10장 35-36절을 보면 모세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 10:35-36)
민수기에 기록된 모세의 이야기는 언약궤가 주의 대적들 즉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는 민족 또는 나라를 흩으시고 도망가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데 있어 언약궤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민수기 14장 후반부를 보면 언약궤가 함께 할 때는 승리를 하지만 함께 하지 않을 때는 패배를 했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에 장로들은 언약궤가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즉 본문에서 블레셋과의 1차전 패배는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너무나도 쉽게 내립니다. 그리곤 승리를 위해서는 언약궤가 필요하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장로들의 결정대로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블레셋과 전쟁을 하고 있는 곳으로 가져왔습니다. 언약궤를 아무나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쟁터에 함께 하오 됩니다.
전쟁터로 옮겨진 언약궤(5-11)
장로들의 결정과 이스라엘 민족의 빠른 행동으로 언약궤가 블레셋과 전쟁을 하고 있는 곳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언약궤가 전쟁터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이스라엘 민족은 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전장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언약궤가 있으니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큰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이스라엘 민족의 환호성을 “땅이 진동하였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보면 이스라엘의 승리에 대한 기대감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1차전에서 큰 패배를 한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땅이 진동할 정도의 큰 함성이 일어나자 블레셋 사람들은 많이 당황해 하였습니다. 그럴만한 것은 1차전에서 크게 패한 이스라엘이 땅이 진동할 정도로 환호성을 지르며, 사기가 오른 모습에 블레셋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왜 이런 환호성을 지르는지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블레셋사람들은 이스라엘 진영에 언약궤가 도착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언약궤가 도착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 블레셋 진영은 사기가 올라가는 이스라엘과 대조적으로 큰 겁을 먹게 됩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처럼 언약궤가 전쟁에 큰 힘을 발휘하는 무기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들이 겁먹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언약궤는 전쟁 무기가 아니라 지성소에 있는 물건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약궤 하나가 1차전 패배를 한 이스라엘에게는 승리에 대한 확신과 1차전 승리를 한 블레셋에게는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오게 된 것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람들의 전쟁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시기와 장소를 한마디로 ‘고대근동’이라고 표현 합니다. 고대근동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전쟁이 사람의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였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신들이 싸움이었으며, 그 신들의 승부에 따라 땅에서 승패가 판가름 나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할 때 반드시 자신들의 신에게 전쟁에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묻고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장면은 구약성경에서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러니 블레셋 군대가 큰 두려움에 빠지게 된 것은 언약궤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블레셋이 겁을 먹었는지는 7절과 8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블레셋은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광야에서 온갖 재앙으로 이집트인들을 치셨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집트인들을 치셨나요? 광야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훈련시키시는 장소였고,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며 이집트인을 치신 곳은 광야가 아니라 이집트의 핵심부인 수도였습니다.
이렇게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블레셋 사람들은 처음부터 가나안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오늘날의 그리스 지역에서 살다가 해안선을 따라 이동해 온 민족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다지 주목 받는 민족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저 힘없고 약한 민족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섬기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집트라는 강대국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잔뜩 긴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원하였습니다. 전쟁을 주도하는 누군가가 9절과 같은 말을 하며 블레셋의 승리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피게 됩니다.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삼상 4:9)
이 말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하여 대장부처럼 싸우라는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기존에 살았던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유’였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도 아끼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이주를 하게 된 것도 자유로운 삶을 살기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전쟁을 이끄는 사람이 한 말인 9절의 내용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전투의 의지를 강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블레셋 군대의 강한 열망 때문일까요? 결국 전쟁은 블레셋의 승리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서 언약궤를 가지고 왔지만, 오히려 그것이 블레셋 사람들의 승리에 대한 열망을 자극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고대근동에서 전쟁이 신들의 전쟁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전쟁에서의 승리는 승리한 나라의 신이 패배한 나라의 신을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의 패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블레셋의 신보다 더 강한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신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언약궤로 인하여 전쟁의 승패가 갈리기도 하였고, 하나님의 강한 능력은 본문의 다음 이야기에 계속 됩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 패한 이유는 언약궤를 자신들의 욕심에 기반을 둔 맹신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맹신은 블레셋 군대의 승리에 대한 간절함을 더욱 크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맹신은 결국 전쟁에서는 패하고, 언약궤까지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지키고 있던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게 됩니다. 이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를 찾아와 이야기 했던 말씀이 이루어 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목적적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이런 저런 어려움들이 발생하면 그들이 찾는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이 배에 큰 풍랑이 일어 죽을 것 같을 때, 그들은 배 위 한편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며 자신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금방이라도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가져갈 것 같던 풍랑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날이 올 때 자신이 예수님과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자리를 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의 욕심에 중심을 두고 예수님 곁에 있었던 제자들의 모습은, 이스라엘 민족이 언약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서 패배를 하였던 것같이 제자들도 큰 패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이후의 내용을 보면 언약궤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언약궤는 스스로 블레셋이 믿고 있던 신을 굴복시키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능력이 없으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죽음도 예수님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결론
그렇다면 본문에서 언약궤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힘이 있는데 이스라엘에게 승리하지 못하게 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언약궤를 바라보는 관점 때문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어떨지 몰라도 언약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언약궤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즉 언약궤를 바라보면서 언약궤가 큰 힘을 발휘하여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들의 욕심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언약궤는 전쟁 무기가 아닙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선악과과 같은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언약궤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잊고,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자신들의 욕심에만 관심을 보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실수를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들은 흔히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 그리고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십자가를 보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거나 생각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착각을 하여 십자가에 큰 힘이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고 살아가면 인생에서 승리를 하게 되고, 나의 인생이 장밋빛 인생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히 틀린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고통이었고, 수치였으며,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나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물론 십자가의 끝은 영광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성공과 연결시키는 것은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떠올리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에만 관심을 가졌던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세상의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들이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보며 하나님을 떠올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많은 것들을 바라보며 나의 욕심을 채우는 성도들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세상의 모든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기 원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나의 욕심 채우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지 않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바라볼 때 나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을 떠올리며 감사할 줄 아는 우리 모두가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며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생각과 눈을 하나님에게 맞출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