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1-11

서론

빌립보서는 예수님의 종인 바울과 디모데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빌립보교회가 설립되는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바울의 목적지는 아시아였습니다. 그런데 환상을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아시아가 아닌 유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설립된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바울의 목적은 한곳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도여행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설립한 빌립보를 떠나게 됩니다. 그 이후 빌립보교회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 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식은 바울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문제들을 바로 잡고자 한통의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빌립보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편지의 서론부분입니다. 내용은 인사말과 빌립보교회에 대한 감사 그리고 빌리보 교회를 향한 기도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우리들의 모습도 돌아보며, 결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바울의 감사

3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감사이유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첫날부터 복음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과 빌립보교회는 복음의 일을 함께하는 동역자의 관계입니다.

바울의 인생을 잠깐 살펴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행 22:3). 그러면서 바울은 소위 잘나가는 바리세인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 이후 복음전하는 일이 그의 사명이 되었습니다. 그 사명은 그가 죽는 날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바리세인이라고 칭송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를 만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면서, 40에서 한 대가 모자란 매를 5번이나 맞았습니다(고후 11:24), 그뿐 아니라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행 16:23).

바울이 복음전파 때문에 법정에 서야 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매번 그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7절을 보면 법정에서 바울을 변론하기 위하여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법정에 출석하여 바울을 변론 하였습니다. 빌립보교회가 바울을 도운 것이 빌립보서 4장 10절과 11절에 더 언급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 감당을 위해, 스스로 돈을 벌어서 선교자금을 충당하려 하였습니다(행 16:3). 한곳에 머무르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스스로 돈을 벌어 복음 전파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바울에게 물질의 후원으로 함께 한 교회가 바로 빌립보교회였습니다.

이렇게 빌립보교회는 바울에게 고마운 교회였으며, 바울도 그 고마움을 항상 느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기에 빌립보 도시를 떠나게 되었지만,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과의 관계는 항상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를 위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 크고 작은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끊임없는 사건 사고들 가운에서 힘이 되어주시는 분은 물론 하나님이셨으며, 그 돕는 손길 가운데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보니 바울의 이러한 감사는 자연스럽게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기도로 연결이 됩니다(빌 1:4).

이러한 상황이 우리에 발생하였다면, 우리들은 빌립보교회가 잘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와 다릅니다. 우리들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잘해주고 고마움이 있다면, 그들의 손길을 잊지 말아주시라는 것과 그들에게 복을 주시라는 기도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듯한 부담감을 갖고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개척이 될 당시에 목회자였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단순히 나를 도와주었으니,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목회자로써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과 빌립보 모든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잠시 살게 되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이곳에서 살다가 우리가 영원히 거하게 되는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준비하고 그곳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에 포인트가 있는 기도였습니다.

바울의 기도를 우리가 유심히 살펴보고 그렇게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바울의 기도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

바울은 4절을 보면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항상 기쁨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방금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계속 강조하는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도는 잠시 살게 되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 너무 많이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하는 바울의 기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지금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하늘나라에 핵심이 있는 기도입니다.

바울의 기도인 9절을 보면, 너희 사랑이 지혜와 모든 총명으로 더욱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빌립보 도시의 특성을 조금 알려 드리고 가겠습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 땅 가운데 한곳이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빌립보교회의 성도들도 당연히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겠지요. 이 말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로마사람과 동등한 자격이 부여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였기에,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증표였습니다. 직접적인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오늘날 백화점에서 VIP회원권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백화점에서 VIP회원권을 가지고 있으면, VIP회원에게만 제공 되는 특별한 대우와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가 VIP가 되어 본적이 없지만, VIP가 된다면 카드 무이자 할부나, 백화점에서 개최하는 다양한 강좌를 무료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혜택들이 주어집니다. 이처럼 바울이 살아있을 당시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음으로 받을 수 있는, 혜택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육입니다. 교육을 받는 사람과 받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현격하게 크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저희 부부가 결혼을 하고 피아노학원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면서 전기 배선이 조금 잘못되어서, 전기에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제가 이리저리 손을 대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퍽!!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곤 벽에 있는 모든 전기 콘센트가 나가버렸습니다. 그때 얼마나 당황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황스러운 상황을 해결하신 분은 전기에 대한 교육을 잘 받으신 전문가 분이 오셔서 해결되었습니다.

이처럼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문제를 만드는 것과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이상의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로마시민권을 갖지 못한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와 총명이 뛰어났겠지요. 이런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지혜와 모든 총명이 더욱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하는 부분은 지혜와 모든 총명 앞에 있는 “너희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지혜와 모든 총명은 사랑을 더욱더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지혜와 총명함이라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전문지식을 쌓기 위한 오늘 날의 학원과 같은 곳이 아닙니다. 빌립보교회는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만이 넘쳐난다면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 공동체이지만,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사이에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교회는 누군가의 말이 맞고 틀리다는 것을 찾는 곳이 아니고, 서로가 잘못 행동을 하고 있거나 모르는 것이 있다면, 배우고 알려주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나 혼자만 지식을 독점하거나 내 주장만 옳다고 주장하는 일이 발생하겠지요. 그러면 결국 교회라는 공동체는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사랑이 지혜와 모든 총명함으로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빌립보 교회에 자신들의 행동이 옳고, 편이 갈림으로 인하여 교회가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계파 갈등을 해소함으로 빌립보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을 기대하고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두 번째 기도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도시의 사람들은 지혜와 총명함이 가득하기를 원하는 바울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지혜와 총명함이 가득한 사람들이 빌립보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그럴싸한 논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말하고, 구약의 율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성도들을 설득을 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변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오히려 우리들의 죄를 밝히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시키신 율법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율법을 기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접근해야 합니다. 마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버리는 일이 없는 것처럼(마 9:17), 새 시대에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갔다면, 새로운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옳습니다.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며,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의 죄 값을 치르셨기에, 우리들은 이제 율법 아래서의 행위적인 모습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빌립보 성도들에게 율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은, 결국 새로운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역행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율법을 강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와 헌신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은 분명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지극히 선한 것 즉 율법의 그늘에 들어가 율법적인 삶을 사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 가운데 무엇이 선한 것이며, 무엇이 악한 것인지를 잘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지식과 총명함을 더욱 풍성하게 하며,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 할 수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오늘에서 멈춰버린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세 번째 기도는, 이러한 믿음을 그리스도의 날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지키고 가야 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흠을 내거나, 아주 작은 오염된 믿음을 첨가하려는 많은 공격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격들을 이겨내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순전하고 흠이 없는 믿음을 지켜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믿음을 지키는데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들에게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습은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과 동시에 우리들의 믿음을 흔드는 일들과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가운데에서 너무나도 당연시 되었던 제사가 월별로 준비가 되었고, 바쁜 현대의 삶으로 인하여 온통 나의 머릿속에는 해야 하는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해야 하는 일에 정신을 쏟고, 열심히 살다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지식과 경험이 나의 행동에 대하여 너무나도 쉽게 정당성을 부여해 버립니다.

내가 예전에 경험해 보았는데, 한국이라는 사회는 법을 지키면서 살면 손해를 본다. 그러니 내가 비록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지만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살기위해서 불법 또는 편법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을 하며 행동을 하게 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운전을 하다가 신호위반으로 범칙금을 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저에게는 “난 그리스도인이니 세상의 법도 잘 지키면서 살아야 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늘 다니던 길에 차도 별로 없고 길을 건너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가면 시간 단축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행동에 너무나도 쉽게 정당성을 부여해버리고, 그곳을 지나면서 항상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다 결국 경찰에 걸려 범칙금을 내게 되었지요. 지금도 너무나도 아까운 범칙금 3만원과 그 당시 느꼈던 좋지 않은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일처럼 조금씩 사회와 나의 환경, 사고방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조금씩 조금씩 흠집을 내게 만듭니다.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잘못된 것으로 인정이 되었던 것들이 언젠가 이미 내 삶의 중심에 와 있게 되는 경험들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것들을 철저히 차단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순전하고 흠 없는 믿음을 지키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11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의에 대하여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의는 착한 것이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한다면 우리가 의를 행하는 것이며, 의인이라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것이 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의인과 전혀 거리가 먼 죄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태어나면서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나오는 것이지요. 여기에 태어난지 82일 된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아이도 죄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또한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억울하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삶을 모조리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이 맞다 틀리다라고 이이기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아주 작은 일처럼 보이는 것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무시했다 또는 내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의 존재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조금더 깊이 보자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상대편에 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작다고 생각할지라도 그 중심에 인간모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행동이기에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떼 주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시하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인간이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인간에서 의인이라고 평가를 받을지라도 여전히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어떤 것을 하여도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거나 헌금을 많이 한다거나 전도를 많이 한다거나, 예배를 많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꼬리표를 떼는 것은 내 마음의 중심에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의인이라는 인정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한 의의 열매가 우리들의 삶에서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결국 구원이라는 것은 행동이 아닌 믿음으로 우리게 받는 것이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만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맞게 따르는 행동도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면, 우리들의 행동은 하나님에 올려드리는 영광과 찬송입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위하여 이러한 기도를 하는 이유는 빌립보교회에서 이러한 것들의 부족으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 인하여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길 원하는 마음에서 이러한 기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의 기도가 빌립보 성도들에게만 해당이 되고 나 또는 우리의 삶과 전혀 거리가 멀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성도들이 겪고 있는 일들이 우리들의 모습에서 너무나도 똑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기도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만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기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바울은 함께 하고 있지 않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바울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바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바울과 같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줄 사람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목회자가 있나봅니다.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도들은 목회자의 사역을 돕고,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신앙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도우며, 서로 기도하는 아름다운 동행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지금 내가 어떤 직분에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 직분에서 내가 해야 할 일 또는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하나님 먼저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하고, 저에게 이러한 직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라고 그리고 각자의 결단을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